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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가 쓰고 싶을 때 나는 라면물을 올린다 2

 

“산을 넘어가는 여행자처럼 우리는 참고 견디며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물론 산이 없다면 그 길이 훨씬 쾌적하고 시간도 적게 걸리겠지만, 거기 산이 있으니 넘어야 할 밖에요.”

 

Man muß sich darein resignieren wie ein Reisender, der über einen Berg muß; freilich, wäre der Berg nicht da, so wär der Weg viel bequemer und kürzer; er ist nun aber da, und man soll hinüber!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주인공 베르테르가 존경하는 C백작이 들려준 말입니다. 베르테르의 투정성 인생 상담에 해준 조언이지요. 좋은 말이긴 하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사실 대단한 조언은 아닙니다. 조언 혹은 충고라는 건 누가 어떤 맥락에서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소설의 내용을 살펴보면 C백작이 면피성으로 대충 좋은 말을 던지며 형식적으로 조언한 게 아니라 진지하게 대응한 걸로 보입니다. 그래서 베르테르에게 존경을 받을 만한 인물이겠지요. 또는 존경을 받는 인물이기에 그렇게 답했겠지요.

 

“꽃길만 걸으세요.” 

 

들으면 기분 좋은 말이기는 하지만 보통 이렇게 조언하지는 않습니다. ‘꽃길만 걸으세요’는 흔히 하는 대표적인 축복의 말입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꽃길을 걷고 꽃가마만 타고 다니라고 아이와 그 부모에게 기원을 건네지만, 그 말을 듣고 몇 년만 지나도 아이는 인생이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됩니다. 

 

드물지만 확실히 꽃길이 있기는 합니다. 사회학적으로는 꽃길과 그 반대 개념, 음 진창길이라고 할까요, 크게 보아 그렇게 분명히 구분된 두 종류의 길이 세상사에서 쉽게 확인됩니다. 하지만 겉보기와 달리 남들이 꽃길이라고 부르는 그곳에서 당사자는 고통스럽게 허덕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개인을 분석단위로 한 실존철학에선 대체로 두 길이 잘 구분되지 않습니다. 겉보기에 꽃길을 걷고 있는 사람이라 하여도 그 사람이 느끼기에 자신의 길은 진창길일 수 있으니까요.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사람마다 지고 가야 하는 십자가의 무게가 제각각인데, 한 사람 한 사람에겐 그가 진 십자가가 자신에게 가장 무거운 법이니까요. 자신에게 그것보다 더 무거운 십자가가 가능하지 않은 게 세상살이의 이치입니다. 

 

주변을 둘러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저 사람들은 나보다 훨씬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며 이론상으로는 자신이 진 무게가 별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겠다 싶습니다. 이론과 현실은 다릅니다. 우선 주변을 둘러보는 게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둘러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하여도 그 깨달음이라는 것이 아주 잠깐만 유지될 겁니다. 깨달음이 삶의 무게 자체를 없애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옆의 사람이 태산만 한 바위를 지고 있고 자신이 돌멩이 하나 들고 있다고 하여도 체감하는 무게는 돌멩이뿐입니다. 비교급은 문법의 항목이지 삶의 감각이 아닙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여전히 방구석에 놓인 제 십자가를 목격하게 되고 곧 제 삶의 무게가 세상의 무게를 압도하게 됩니다. 눈꺼풀의 무게가 세상의 무게보다 무겁다는 말이 아마 이런 의미일 겁니다.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눈꺼풀을 들어 올리면 세상을 들어 올리는 건 일도 아닌 게 됩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 혹은 오후에라도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면, 적어도 오늘 하루는 내가 세상을 감당해내고 있다고 스스로 대견하게 생각해도 좋지 않을까요.     

 

20세기, 그것도 심지어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어쩌면 조만간 100살을 채울 것으로 기대되는 내 어머니가 30대 나이에 눈꺼풀로 눈을 덮은 채 한 일 가운데는 내 태몽을 꾼 것이 포함됩니다. 어머니가 꾼 태몽의 무대는 어머니 친정집 뒷마당이었고, 꿈에서 빨간 능구렁이가 그곳의 돌감나무를 휘감아 위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어머니 친정 마을에 감나무가 많았는데, 하필 내 태몽 속의 능구렁이는 열매가 보잘것없는 돌감나무를 택해서 올라간 것이지요. 

 

태몽 스토리의 난감함은 돌감나무에 그치지 않습니다. 빨간 능구렁이가 나무를 감아 올라가는 것을 꿈속에서 어머니가 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갑자기 낫으로 내리치더랍니다. 뱀이 두 동강 나며 나무에서 땅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어머니는 능구렁이가 무섭지 않았고 다만 그런 광경을 보고는 ‘저 뱀이 죽었나 보다’ 하고 걱정하게 되었다고 하네요. 꿈속이니까요. 한데 끊어진 두 몸이 꿈틀꿈틀 움직여 하나로 붙더니 능구렁이가 다시 나무를 올라갔습니다. 꿈속에서, 올라가고 낫에 두 동강 나고 붙어서 다시 올라가고, 그런 과정을 반복했다고 하네요. 누가 들어도 특이한 태몽이라고 하지 싶어요.

 

“그래서 능구렁이가 어떻게 됐어요?” 어머니는 끝까지 올라갔다고 답했습니다. 어머니가 내게 거짓말을 한 듯합니다. 태몽 때문에 내가 어릴 때 죽을 줄 알았다고 어머니가 언젠가 오래전에 무심결에 말한 적이 있는 거로 보아 태몽에서 그 빨간 능구렁이가 마지막 일격을 당한 후에는 아마 땅에 떨어져 부활하지 못한 듯합니다. 

 

내 팔에는 어릴 때 사고로 생긴 상처가 있습니다. 그게 꼭 뱀이 나무를 휘감아 올라가는 모양입니다. 수술 봉합 부위가 덧나는 바람에 상처가 매끄럽게 붙지 않아 머리 모양이 생겼고 혀와 날렵한 꼬리까지 있습니다. 어머니는 사고로 만들어진 내 팔 뱀 모양의 흉터가 태몽의 불길한 기운을 액땜했다고 말합니다. 능구렁이가 끝까지 올라갔다고 하면서 동시에 흉터로 태몽을 액땜했다는 논리적으로 상충하는 얘기를 합니다. 

 

나는 노모의 상반된 두 이야기를 모두 믿습니다. 어머니 꿈속의 빨간 능구렁이가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갔으며, 만일 끝내 올라가지 못했다고 하여도 사고로 생긴 뱀 ‘문신’이 그 추락을 액땜했다고 믿습니다. 어머니의 태몽과 어머니의 판단에 굳이 토를 달 이유가 없습니다. 내 기분 좋아지라고 하는 이야기고, 그러면 어머니 기분도 좋아질 테니까요. 여담으로, 태몽 이야기를 듣고 정말 거기다가 빨간 능구렁이 문신을 새기는 게 어떠냐고 말씀하신 분이 있었고 솔깃하게 받아들였지만 제안을 아직 수용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든 다음에는 빨간 능구렁이가 결국엔 바닥에 떨어져 끝내 올라가지 못했다는 서사가 더 마음에 듭니다. 능구렁이가 올라간들 어디까지 올라가겠습니까. 나무초리 너머 하늘로 점프할 수는 없는 노릇일 테니까요. 끊어진 몸을 붙이느라, 또 같은 길을 꾸역꾸역 올라가느라 애쓴 어머니 꿈속의 빨간 능구렁이가, 어머니 말씀대로라면 그렇게 기를 쓰고 올라가려고 한 능구렁이가, 둘로 잘린 몸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쨌거나 자신이 오르려고 한 나무 아래에서 최종적인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Gebirgslandschaft (Mountain Landscape)

실존주의를 포함하여 현대 철학에 큰 영향을 미친 독일 철학자인 마르틴 하이데거에게 현존재(現存在, Dasein)는 그의 철학의 중요한 개념 중 하나입니다.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내어놓은 난해한 내용의 구체적 철학은 접어두기로 하고, 현존재를 간단히 인간으로 이해하면 된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 책에 담긴 내용과 달리 현존재 즉 다자인(Dasein)이란 용어 자체는 아주 쉽게 만들어졌습니다. 독일어로 ‘거기’를 뜻하는 ‘Da’와 ‘있음’(영어의 be 동사)을 뜻하는 ‘Sein’을 합한 것입니다. 인간은 거기에 있는 그 무엇인 거죠. 

 

‘거기 있음’은 멀리 떨어져 존재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의미상 ‘여기 있음’으로 받아들여 무방합니다. 현존재는 삶의 일상성에 짓눌려 무너지고 계속해서 조각조각 부서져 내리고 있지만 동시에 새로운 세계를 열 가능성을 지닙니다. 자유를 끊임없이 잠식당하지만 자유를 회복하려는 도전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나는 어머니가 꾼 내 태몽의 능구렁이를 떠올렸습니다. 독자는 내 태몽과 비슷하지만 개인의 고유한 경험 속 자신의 ‘빨간 능구렁이’를 떠올릴 법합니다.

 

흥미롭게도 C백작이 베르테르에게 한 말 가운데서도 ‘Da’와 ‘Sein’(wäre와 wär, sein의 변형으로 ‘가정’을 뜻한다)이 발견됩니다. 산이 거기 있으니 넘어야 한다고 백작이 역설합니다. “넘어야 한다”고 말할 때 사용한 단어가 영어의 ‘should’에 해당하는 ‘soll’(sollen의 3인칭 단수 현재형)이란 점 또한 눈여겨봐야 합니다. 산이 거기(혹은 앞에) 있을 때 그 산을 넘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무게가 어떤 무게이든 제 십자가를 져야 하고, 높이가 얼마이든 제 앞의 산을 넘는 게 인간의 숙명입니다. 

 

현존재가 인간이라고 앞에서 말했습니다. C백작의 말에서는 산이 거기 있어서, 마치 산이 현존재처럼 느껴집니다. 자기 앞의 산을 제 앞으로 끌어내서 자신과 호응하게 하며 넘기를 결심하고 결행하는 게 인간이라고 받아들이면 되겠습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기 앞의 산을 자신이 넘어야 할 산으로 인식하는 냉철에서 시작하고, 좋은 어른이 된다 함은, 인식을 실천으로 전환하여 뚜벅뚜벅 걸어가는 무던함과 끈기를 발휘하는 행태 그 자체입니다. 하이데거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존재론의 기본적 물음을 해명하는 ‘길’을 추구하며, 그 길을 실제로 ‘걷는 일’이 중요하다. 그것이 ‘단 하나의’ 길인지 아닌지, 또 그것이 애초에 ‘제대로 된’ 길인지 어떤지는, 그 길을 걸은 다음에야 비로소 결정할 수 있는 문제이다.” 

– 마르티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동서문화사, 전양범 옮김)     

 

그러나 만일 그 길을 걷는 게 두렵고 힘들다면, 지금 너무 지쳤다는 판단이 든다면, 잠시 머뭇거리며 딴짓을 하여도 좋습니다. ‘should’가 세상의 ‘should’이지, 나의 ‘should’는 아니라고 회피하여도 무방합니다. 세상의 많은 꼰대 중 일인으로서 원하지 않을지도 모를 충고를 보태자면, 살아보니 살아집디다. 힘들면 쉬어가도 됩니다. 

 

 

글·안치용

인문학자 겸 평론가로 영화·미술·문학·정치·신학 등에 관한 글을 쓴다. 크리티크M 발행인이다. ESG연구소장으로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을 주제로 활동하며 사회와 소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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