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레미제라블’ 잇단 열연 조정은

작품 초반 흐름 이끄는 ‘주연 못지않은 조연’
초연부터 세 번째 시즌까지 같은 역할 맡아
가장 비참한 인물로 관객들에 강렬한 인상

“처음에는 부담 커 배역 소화하는데만 급급
나이 먹으니 같은 말이라도 다르게 와 닿아”

‘한때는 꿈을 믿었지/ 희망이 가득했던 시절/ 사랑이 영원하도록/ 하늘도 축복할 거라고… 바라던 인생 이건가/ 왜 난 이 지옥에서 사는가/ 그 꿈은 어디로 갔나/ 다신 찾지 못할 내 꿈’

‘비참한 사람들’이란 뜻의 뮤지컬 ‘레미제라블’에서 가장 비참한 인물로 나오는 ‘판틴’의 넘버(노래)이자 이 뮤지컬의 대표곡 중 하나인 ‘아이 드림드 어 드림(I dreamed a dream)’ 가사다. 판틴은 남편이 자신과 어린 딸 코제트를 버리고 떠난 뒤 딸의 양육비를 벌려고 일하던 공장에서 억울하게 쫓겨나자 이 노래를 부른다. 꿈꾸던 순수한 사랑과 희망은 온데간데없고 가난과 고통 속에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그녀의 기구한 삶을 함축해서 보여주는 곡이다. 판틴은 마지막 한 줄기 빛인 딸을 위해 머리카락과 앞니를 뽑아 팔다 거리의 여자까지 되고, 결국 병에 걸려 눈감는다.

‘오페라의 유령’, ‘캣츠’, ‘미스 사이공’과 함께 세계 4대 뮤지컬로 꼽히며 공연 시간이 180분에 달하는 대작 ‘레미제라블’에서 판틴은 이렇게 초반 20분가량 등장하고 마는 조연이지만 작품의 퍼즐을 완성하는 데 주연인 장발장과 자베르 경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 때문에 판틴 역 배우는 그 짧은 시간에 판틴의 불행한 삶과 내면을 관객들에게 오롯이 전달할 수 있는 가창력과 연기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2012년 뮤지컬 영화로 제작돼 선풍적 인기를 얻은 ‘레미제라블’에서 휴 잭맨(장발장 역)과 러셀 크로(자베르 역)보다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긴 판틴 역의 앤 해서웨이가 미국 아카데미상 등 주요 시상식의 여우조연상을 휩쓸었던 이유다.

조정은이 뮤지컬 ‘레미제라블’에서 판틴을 연기하고 있는 모습. 레미제라블코리아 제공

그만큼 판틴은 그 역을 맡은 배우에게 상당한 부담이 되면서도 한 뼘 더 성장할 기회를 준다. 2001년 서울예술단 앙상블로 데뷔한 배우 조정은(44)에게도 마찬가지다.

2013년 국내 초연 당시 판틴으로 ‘레미제라블’에 출연한 그는 2015년 재연에 이어 지난해 11월 개막한 세 번째 시즌에서도 판틴으로 관객과 만나고 있다.

지난 29일 공연장인 서울 용산구 블루스퀘어(3월10일까지 공연)에서 만난 조정은은 ‘레미제라블’을 이야기와 메시지, 노래, 무대 연출 등 모든 면에서 흠이 없는 뮤지컬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배우로서도 되게 공부가 많이 되는 훌륭한 작품이다. (특히) 판틴 역은 세 번째인데 모두 저한테는 많이 달랐다”고 말했다. “초연 때는 적은 분량과 시간 내에 판틴의 이야기를 잘 전달해야 한다는 부담이 커서 작품이 요구하는 판틴을 해내는 데 급급했던 것 같아 아쉬움이 컸어요. 나이를 먹은 지금은 같은 말이라도 와 닿는 게 많이 다릅니다. 판틴의 심정도 초연 때처럼 문자적인 이해가 아니라 제 마음에 그대로 와 닿으니 무슨 대단한 표현을 하지 않아도 관객들에게 잘 전해지는 것 같아요.”

조정은은 초연 당시 ‘벽돌 책’이라고 불릴 만큼 두꺼운 빅토르 위고의 원작 소설 ‘레미제라블’을 읽다가 엄청난 양에 눌려 완독하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눈에 들어와 다 읽었다고도 했다.

어떤 배역이든 맞춤형으로 녹아드는 배우로 정평이 났지만 그의 나이를 감안하면 언제 다시 할지 모를 ‘레미제라블’에서 다시 판틴 역을 맡기는 쉽지 않을 전망. 그래서 조정은은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공연마다 애틋하게 임하고 있다”며 “판틴의 출연 분량이 짧은데 저한테는 한 작품을 하는 느낌이 든다. ‘레미제라블’의 한 부분인 그 순간이 잘 맞아들어가 관객들에게 작품 전체의 그림이 온전히 전달되길 바란다”고 했다. 이어 판틴의 유일한 넘버인 ‘아이 드림드 어 드림’에 대해서도 “그 한 곡에 담긴 판틴의 드마라를 다 찾아 관객들에게 보여주려고 최대한의 기량을 발휘해 노래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판틴이 안타까운 죽음을 맞고 나면 잠시 퇴장했다가 숨을 고른 뒤 앙상블 중 한 명으로 다시 등장한다. 감자를 깎기도 하는 ‘앙상블 조정은’을 찾아보는 것도 관객에겐 소소한 재미다.

어느덧 24년 차 배우가 된 그는 “비싼 티켓값에다 식사·교통비 등 큰돈을 지불하고 공연을 보러 오는 관객들이 화가 나서 돌아가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책임감이 좀 더 생겼다”며 과거처럼 뮤지컬만 고집하기보다 기회가 된다면 TV와 영화에도 출연할 의사가 있다고 했다.

“피로든 낙심이든 짜증이든 뭐가 됐든 그런 (안 좋은) 마음이 있는 분들에게 저의 연기나 노래가 기분전환을 할 수 있게 해주는 배우가 됐으면 합니다.”

이강은 선임기자 kele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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