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6.25 전쟁. 1953년 정전협정 체결 이후 70여년 동안 ‘한반도 전면전 위기론’이 국내에서 사그라든 적은 없었다. 

 

북한이 수사적 위협만 해도 시장에서 사재기가 벌어진 것이 우리네 부모님 세대가 겪었던 일이었다. 이젠 북한이 ‘말폭탄’을 퍼부어도 서울 시내는 평온할 정도로 우리 사회가 성숙해지긴 했지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1월 28일 신형 잠수함발사전략순항미사일(SLCM) 불화살-3-31형 시험발사를 지도하면서 간부들에게 지시를 하고 있다. 조선중앙TV·뉴시스

올해 들어 제기된 전쟁 위기는 결이 다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 연말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지난 15일 최고인민회의에서 한국을 ‘제1의 적대국’ ‘불변의 주적’으로 규정하는 등 대남 적대 수위를 높였다. 

 

미국 미들베리국제연구소 로버트 칼린 연구원과 지그프리트 해커 교수가 최근 북한 전문매체 38노스 기고문에서 “한반도가 1950년 6월 초 이후 어느 때보다 위험하다. 김 위원장이 전쟁하겠다는 전략적 결정을 했다”고 하면서 ‘한반도 위기론’은 더욱 증폭되는 모양새다.

 

과연 김 위원장은 전쟁할 각오를 했을까. 아니라면 왜 민족과 통일개념을 부정하면서까지 위협 수위를 끌어올릴까. 그 답에 대한 키워드는 ‘핵’ ‘주권’이다. 남북 관계의 전면적 재검토 필요성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바늘만한 틈도 파고드는 北

 

북한의 이같은 움직임에 대해선 크게 두 가지 의견이 나온다. 우선 북한이 정말로 전쟁을 결심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북한은 전쟁 수행능력을 꾸준히 강화해왔고, 남한을 향한 태도도 더 강경해지고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 26일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과 함께 평양에서 열린 무장장비전시회 2023을 둘러보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조선중앙TV·뉴시스

하지만 이것이 김 위원장이 전쟁을 원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어떤 강대국도 전쟁을 일으키려면 상당한 준비와 시간이 필요하다. 전쟁계획에 명시된 수준의 군수품을 비축하고, 부대를 공격 개시선에 전개, 훈련을 진행하면서 함께 작전을 펼칠 체계를 만들고 지휘부 구성도 해야 한다.

 

실제로 러시아는 2022년 1월부터 우크라이나 국경과 벨라루스, 크름반도에 병력과 장비 및 물자를 모으고 훈련을 거듭한 뒤 2월 24일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북한은 지난해부터 수백만발의 포탄과 다연장로켓탄, 탄도미사일을 러시아에 수출했다. 탄약이 없으면 1초도 싸울 수 없는 것이 전쟁이다. 전쟁을 하려면 포탄을 모아야 하는데, 북한은 러시아에 막대한 양을 판매하고 있다. 전쟁 의지가 정말로 있느냐는 의문이 나오는 부분이다.

 

다만 북한이 무인기 침투 비행 등의 저강도 도발을 감행할 가능성은 남아있다. 

 

정전협정 체제의 수호자인 유엔군사령부가 있는 상황에서 한국군이 대북 선제공격에 나서기는 어렵다. 

 

이를 잘 아는 북한이 미국의 전면적 개입을 피할 수 있는 무인기 침투, 미사일 발사, 서해 북방한계선(NLL) 침범 등의 저강도 도발을 선제적으로 감행, 한반도 정세 주도권 장악을 시도할 수 있다.

북한의 탄도미사일들이 지난 2023년 7월 27일 평양서 열린 전승절(6.25전쟁 정전협정 기념일) 70주년 열병식장에 등장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전쟁을 원한다기보다는 체제 유지를 위한 ‘선긋기’라는 해석도 있다.

 

김 위원장이 연말과 연초에 언급한 ‘적대적 두 국가관계’는 남북이 민족 관계가 아닌 국가간 관계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국가간 관계에선 주권이 중시된다. 주권을 지닌 국가를 다른 나라가 함부로 점령·합병하거나 간섭할 수 없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세계적 비난에 직면한 것도, 이라크를 침공했던 미국이 합병 대신 새 정부를 만든 것도 이 때문이다.

 

김 위원장의 주장대로 남북 관계가 재편된다면, 한반도 유사시 북한 지역을 수복한다는 한미 연합 작전계획은 실행할 수 없다. 주권을 지닌 국가를 합병·점령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민족’이라는 정서 속에서 가능했던 북한 인권과 중국 내 북한 이탈주민 강제송환 등에 대한 우리측 문제 제기도 벽에 부딪힐 수 있다. 북한 입장에선 김정은 체제를 위협하는 외부의 모든 요소를 차단하는 셈이다.

 

김정은 체제를 지키는 방패가 ‘적대국 관계’라면, 핵무기는 창 역할을 한다. 

 

북한은 2016년 노동당 7차 대회에서 핵무기 사용 조건으로 ‘우리의 자주권을 침해하지 않는 한’이라는 애매한 표현을 사용했다. 자주권을 침해하면 핵무기를 쓸 수 있다는 의미나 다름없다. 사실상의 핵 선제 사용 선언이다.

 

이후 핵무기를 꾸준히 만든 북한은 지난해 헌법에 핵무력 정책을 반영했다. 

 

재래식 전쟁에서도 언제든 핵무기를 먼저 사용, 확전 수준을 결정하는 주도권을 먼저 장악하겠다는 의미다. 압도적 확장억제력을 바탕으로 전쟁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다는 한미 연합군 인식의 틈을 파고드는 셈이다. 

 

군사적으론 확전의 주도권을 먼저 행사할 준비를 하고, 정치적으론 주권 개념을 내세우면 한반도 유사시 북한이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도 김정은 체제를 지켜낼 기반은 마련할 수 있다.

 

과거의 단순한 핵협박과는 차원이 다르다. 실효성이 불확실한 경제 정책과 달리 체제의 생존을 위해 정교한 계산을 거듭한 결과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2023년 3월 27일 장소가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 핵무기병기화사업을 현지 지도하면서 간부들과 대화하고 있다. 조선중앙TV·뉴시스

◆근본적 정책 전환 필요

 

물론 김 위원장의 뜻대로 한반도 정세가 흘러갈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한국과 미국이 북한의 의도대로 따라갈 이유나 필요성은 없다.

 

남북은 같은 말을 쓰는 한민족이며, 통일의 당위성은 김 위원장 말폭탄 한 번으로 사라지진 않는다.

 

하지만 북한이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며 대남 압박 수위를 높이는 상황에서 한국도 정책과 전략의 전환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통일의 당위성 위에서 점진적 방식으로 새로운 길을 닦자는 것이다.

 

경제협력을 통한 긴장완화는 개성공단과 금강산 지구 폐쇄로 효력을 잃었다. 스포츠 단일팀도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당시 여자 아이스하키팀을 놓고 찬반 논란이 일었다. 

 

남북간에 끊어졌던 것을 다시 이어서 국민의 호응을 얻고 북한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내는 접근법은 전임 정부 시절부터 효력을 잃고 있었다.

 

북한이 대남 강경 태도를 강화하며 민족 개념까지 부정하는 국면에선 전통적 방식의 대북 접근법은 한계가 뚜렷하다.

 

현실로 다가오는 트럼프 리스크도 변수다. 동맹을 중시하는 바이든 행정부 기조와 달리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대폭 증액 요구 등 미국의 이익에 집중하던 트럼프 1기 미 행정부 모습이 재연된다면, 한미 동맹에도 상당한 파장이 불가피하다.

 

트럼프 집권 이후 북한이 한국을 건너뛰고 미국과 직접 담판을 짓고자 2017년 위기 국면처럼 한반도 정세를 고도의 긴장 국면으로 몰아갈 수도 있다. 

 

연초부터 포사격과 순항미사일 발사를 거듭해온 북한은 3월 한미 연합훈련과 4월 총선 등을 노리고 도발적 행동을 감행할 가능성이 크다. 정세가 더욱 악화할 위험이 있는 셈이다.

북한의 초대형방사포들이 지난 2023년 7월 27일 평양서 열린 전승절(6.25전쟁 정전협정 기념일) 70주년 열병식장에 등장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다만 북한이 한 가닥 이성의 끈마저 놓아버릴 위험은 적다.

 

북한은 비이성적 집단이 아니다. 이성적 목표를 달성하고자 비이성적 방법을 즐겨 쓰는 집단일 뿐이다. 제임스 루이스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부소장은 외교안보 전문지 내셔널 인터레스트 글에서 “김정은은 미치지 않았다. 그가 온갖 쇼를 할 수 있어도 전쟁을 시작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기존의 압박 정책만으로는 북한의 행보에 대응하기에 한계가 있다.

 

비이성적 방법을 쓰는 집단의 의도를 파악해 그들을 상대할 방법을 만들려면, 그들과 접촉해야 한다. 지금처럼 압박만 하는 대신 억제와 대화를 병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펄펄 끓는 냄비의 뚜껑을 누르기만 하면 언젠가 냄비가 터진다. 냄비에서 터진 요리가 주방을 쑥밭으로 만들면 그 뒷감당은 누가 할까. 

 

적절히 김을 빼며 냄비를 ‘관리’해야 주방을 깨끗하게 유지하면서 맛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다.

 

북한을 다루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북한 도발을 저지하고 응징할 군사대비태세를 갖춰 압박을 유지하면서 대화를 병행해 북한의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북한군 병사들이 총을 든 채 평양 김일성 광장을 행진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로버트 아인혼 전 미 국무부 비확산·군축 담당 특별보좌관은 미국평화연구소(USIP) 기고에서 “전쟁을 피하고 궁극적으로 평화를 달성하려면 억제는 외교와 함께 가야한다”며 북한이 한미의 대화 제의를 거부한 것을 인정하면서도 “외교 노력을 재개할 때가 됐을 수 있다”고 밝혔다.

 

이밖에도 북한 동향과 의도에 대해 한미간 정책이나 시각 불일치가 발생하지 않도록 긴밀한 정보공유와 협의도 이뤄져야 한다. 트럼프 캠프나 미 공화당 주류의 대외 정책 연구와 접근도 필수다.

 

이를 토대로 북한의 ‘적대국 관계’ 개념에 맞설 새로운 길을 만드는데 정부와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야 한다. 외교, 통일, 국방, 경제 등 모든 분야를 망라한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다.

 

하지만 현 정부는 오는 4월에 있을 총선을 기준으로 보는 모양새다. 김정은 정권이 한반도와 한미 관계의 과거, 현재를 들여다보고 한반도 미래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끌어가려는 의도를 드러내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북한이 체제의 생존을 위해 바늘만한 크기의 틈도 파고드는 집념 앞에서 우리는 북한을 ‘비이성적 집단’이라 딱지를 붙인 채 무심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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