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성범죄 희생자와 그 주변인의 내밀한 심리 상태 섬세히 포착

영화 <정순> 공식 포스터

한국 상업영화의 현실 외면, 그 빈 자리 채우는 다양성 영화

한국의 상업영화가 대중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극히 한정적이다. 그도 그럴 것이 투자를 유치하려면 작품의 소재는 자본의 규모를 키울 수 있는 것이어야 하고, 그것을 담아내는 이야기는 대중들의 평균적인 입맛을 자극할 수 있을 법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한국의 상업영화 속 소재와 이야기는 정작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일상적인 현실을 늘 외면하기 일쑤였다. 새삼스럽지만 영화계에서 그러한 빈 자리를 채워 온 것은 이른바 다양성 영화들이다. 올해에도 <모르는 이야기>(양근영 감독), <벗어날 탈>(서보형 감독), <서바이벌 택틱스> (박근영 감독) 등 걸출한 다양성 영화 작품들이 개봉했는데, 이들은 대부분 실험영화와 서사영화의 중간쯤 어디에인가 위치하고 있는 무정형적 영화에 가깝다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가운데 최근 개봉한 <정순>(정지혜 감독)은 정통 서사영화의 틀 안에서 디지털 성범죄를 소재로 삼은 작품으로, 중년 여성이 그 희생자라는 점에서 무차별적 디지털 성범죄의 폭력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무엇보다 상업영화가 외면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실제 현실을 카메라 앵글로 포착하여 가해자의 가증스러운 속내와 희생자의 내밀한 심리 변화를 사실적이고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 만하다. 치가 떨리도록 위선적인 가해자와 가늠할 수 없는 절망 속 희생자의 그 기막힌 만남은 한 소도시 공장에서 이뤄진다.

 

사건 전 사랑스러운 듯 자신의 얼굴 매무새를 가다듬는 정순

<정순>의 이야기

어느 작은 도시 이름 모를 공장에서 일하는 정순(김금순 분)은 폐차장의 홍일점으로 당차게 생활하는 딸 유진(윤금선아 분)과 평범하나 평화로운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여느 때처럼 공장에 출근한 정순은 나이가 어려도 한참 어린 작업 반장 도윤(김최용준)의 폭언에도 늘 그렇듯 묵묵히 자신의 일에 성실히 임한다. 그날 영수(조현우 분)가 작업장 신입으로 들어오고, 정순과 영수는 서로 도움을 주고 받다 급격히 가까워진다. 그렇게 영수와의 핑크빛 로맨스를 누리던 정순의 일상은 공장에서 유포된 한 휴대폰 영상으로 인해 처참히 무너져 내린다. 그날 이후 세상과 자신을 철저히 단절시킨 정순은 자기혐오에 빠진 채 죽음의 시간을 온몸으로 버틴다. 그 사이 딸 유진을 비롯한 공장의 친한 동료들이 정순을 대신해 가해자들에게 맞서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해자들의 일상은 정순과 달리 이전과 크게 바뀐 것이 없다. 한편, 운전을 배우는 등 소소한 일상을 시작하며 상처받은 내면을 서서히 회복해 가던 정순은 자신과 달리 큰 타격 없이 사건 이전처럼 살고 있는 도윤과 영수의 모습을 우연히 목격하며 처절한 분노와 깊은 절망감에 휩싸이는데……    

 

왜곡된 남성성과 가부장적 리더십으로 무차별적 폭력을 생산하는 공장 작업장
왜곡된 남성성과 가부장적 리더십으로 무차별적 폭력을 생산하는 공장 작업장

영리한 사운드 활용 방식

이렇게 영화 <정순>은 중년 여성을 희생자로 삼은 디지털 성범죄라는 소재를 작품의 큰 뼈대로 삼고 있다. 일반적으로 한국 사회(엄밀히 말하면 법정)에서는 성범죄 가해자의 처벌에는 관대하면서도 그 희생자의 피해 복구와 일상으로의 복귀에 대해서는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며 보수적으로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 <정순>에서는 이러한 한국 사회의 모순을 포착하여 그 안에서 사소화되며 후경화되기 일쑤였던 피해자의 공시적 심리 상태와 그것의 통시적 변모 과정에 주목한다.  그러한 등장인물의 심리 묘사는 감독의 사운드 활용 방식으로 더욱 강화된다. 일례로, <정순>에서는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인 작품의 중반까지는 특별한 배경음악(BGM) 없이 ‘정순’의 일상을 둘러싼 주변의 엠비언스를 있는 그대로 노출하는데, 이는 극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사실적이다. 그래서 관객의 시선에서는 극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마저 들게 만드는데, 그것은 관객들이 스크린을 통해 보고 있는 그것이 자신들의 소소한 일상과 크게 다를 것이 없음을  느끼도록 하는 전략으로 해석된다. 이를 통해 지극히 평범한 정순의 일상은 관객 자신의 일상과 일종의 동일시가 이뤄지게 된다. 반면, 사건 직후인 이야기의 중반이후부터는 ‘정순’의 절망감을 강화하는 무음(사일런스)이나 배경음악을 삽입하기 시작함으로써 비로소 관객들이 보고 있는 그것이 극영화임을 상기시켜 준다. 결정적으로, 이는 전반부에 동일시된 ‘정순’의 평범한 일상과 대비되면서 한순간에 처참히 부숴져 버린 일상 속에서 ‘정순’이 느낄 깊은 절망감을 더욱 극명하게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하루 아침에 디지털 성범죄의 희생자가 되어 공장 작업복으로 자신을 가린 채 절망하는 정순
사건 직후 자기혐오에 빠진 채 공장 작업복으로 자신을 가린 정순

탁월한 연기와 흥미로운 캐릭터 대비 

<정순>은 중년 여성 대상의 디지털 성범죄를 정면에서 다룬다는 점에서 태생적으로 특수한 소재의 강렬한 이야기이다. 그러한 점에서 그것을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있는 그대로, 그러나 가장 영화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긴요하게 요구되는데, 1차적으로 그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은 영화 속의 등장인물들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정순>과 같은 작품들의 완성도는 기본적으로 배우들의 연기력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점에서 ‘정순’으로 분한 김금순과 딸 ‘유진’을 연기한 윤금선아의 연기는 탁월했다. ‘정순’이 새 것을 예쁘게 포장하는 공장 근로자로서 전통적인 여성성을 드러내고 있다면, ‘유진’은 헌 것을 과감히 깨부수는 폐차장 근로자로서 ‘정순’과 대비되는 캐릭터성을 지니고 있다. 이 가운데 ‘정순’을 연기한 배우 김금순은 올초에 개봉한 <울산의 별>에서 경이로운 연기를 선보이며 2022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올해의 배우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이 영화 <정순>으로는 2022년 로마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개인적인 연기평은 차치하고 <정순>에서는 분노를 삼키며 절제된 ‘정순’의 심리를, <울산의 별>에서 분노를 폭발시키는 ‘윤화’를 연기함으로써 ‘정순’과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며 국내외에서 호평을 받은 김금순은 분명 2024년 올해 주목해야 할 배우임에 틀림없다.  김금순과 더불어 딸 ‘유진’으로 등장하는 배우 윤금선아 또한 2022년 제24회 부산독립영화제 최우수연기상 수상자답게 <정순>에서 훌륭한 연기를 선보인다. 특히, ‘정순’과 대비되는 당찬 여성의 모습과 디지털 성범죄 희생자 가족을 곁에서 바라보며 흐느끼는 딸의 모습을 균형감 있게 소화해 내며 작품 속 연대하는 여성들의 서사를 한층 더 강화한다. 

 

일상으로 복귀하고자 애써 보는 정순
압제당한 일상을 되찾으려 조용히 애써 보는 정순

그럼에도 나아가는 여성들

영화 <정순>에는 자동차가 자주 등장한다. ‘정순’의 딸 ‘유진’은 폐차장에서 매일처럼 못 쓰게 된 자동차를 해체하고, ‘정순’을 연모하는 ‘영수’는 중고차를 사들여 ‘정순’을 데리고 소풍을 가며, 운전을 못하던 ‘정순’은 사건 이후 압제당한 일상을 되찾으려는 조용한 노력으로 운전부터 배운다. 여기서 자동차는 단순히 이동 수단이 아닌 삶의 지속성과 주도성을 상징하는 매개체가 된다. 과거 자동차가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시절, 여성들의 삶은 남성에 의해 그 방향이 결정되었고, 여성의 행복은 남성 주도하에 주어진다고 여겨지기도 했었다. 그러한 구시대적 발상은 <정순>에서 ‘영수’와 ‘도윤’으로 대표되는 공장 내 남성들의 언행에서 그대로 묻어난다. 그에 반해 ‘유진’은 그러한 구시대적 발상과는 동떨어진 주도적 여성으로 등장한다. ‘유진’은 스스로 운전해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이동하고 엄마인 ‘정순’이 가고자 하는 데로 데리고 언제든 가며, 그가 일하는 곳마저 구시대적 발상으로 점철된 자동차를 완전히 깨부수는 폐차장이다. 이러한 ‘유진’은 사건 이후 엄마인 ‘정순’을 가장 가까이서 조력하는데, 그러한 ‘유진’의 모습이 영화적으로는 여성들의 연대와 그 잠잠한 힘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연대 안에서 ‘정순’은 마침내 스스로 운전대를 잡고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나아갈 용기를 얻는다.

 

 

글·윤필립

영화평론가, 응용언어학자. 한국어교육학을 전공하고 대학에서 강의하며 담화분석과 대중문화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한국시나리오작가협회 교육원을 수료했으며, 무궁화 스토리텔링 공모전 동화 입선, 서울국제사랑영화제(SIAFF)에서 기독교 영화 비평 대상 수상,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 당선 등을 했다. 만화평론상, 대종상,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 심사위원 및 영평상 집행부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세종사이버대학교 한국어학과 초빙교수 및 한국어교육원장,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집행부, 한국문법교육학회 편집이사 등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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