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억압에 맞선 톱그룹 수영 ‘와이프’
또 하나의 문을 연 김세정 ‘템플’

배우 김세정이 출연한 연극 ‘템플’ [극단 ‘공연 배달 서비스 간다’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문이 열렸고, 전, 걸어나왔습니다.”

연극 ‘템플’의 한 장면. 김세정은 이 한 문장을 말하는 동안 호흡을 두 번 멈췄다. 찰나의 공백에 감정의 변화가 담겼다.

떨리는 음성엔 나를 깨부수고 나올 문이 열리기까지의 두려움, 마침내 문이 열리는 순간을 마주한 기쁨, 그 문턱을 넘어섰을 때의 뿌듯함과 벅참이 묻어났다. 그 모든 감정과 감정 사이의 호흡이 배우의 얼굴과 목소리를 통해 객석 끝까지 맞닿자, 저마다의 문을 찾는 관객들의 훌쩍임이 커졌다.

때로는 아주 짧은 대사에서 배우의 민낯을 보게 된다. 한 줄의 대사엔 그것을 말하기까지 쌓아온 감정의 서사가 응축된다. 격렬한 언쟁이나 감정의 진폭을 드러내는 장면보다 더 배우의 기량을 보여줄 수 있는 장면들이다.

무대로 걸어나온 두 배우에게도 그런 장면들이 있었다. 배우 최수영과 김세정이다. 연극과는 ‘초면’인 두 사람은 크고 화려한 가수 시절의 무대에서 내려와 불과 300~400여 명의 관객 앞에 섰다. 걸그룹으로 활동하던 때나, TV드라마에선 볼 수 없었던 모습도 만나게 된다.

연극 ‘와이프’ [글림컴퍼니 제공]

시대의 억압에 맞선 톱 걸그룹…‘와이프’ 수영의 1인 3역

2024년의 클레어. 그는 여성의 역사를 뼛속 깊이 새긴 페미니스트다. 최초의 페미니즘 연극으로 불린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을 보고 온 클레어는 작품 속 주인공인 게이 핀에게 이렇게 말한다.

“왜 노라를 당신이 연기했나요? 시대에 뒤떨어진 억압이요? 여자들은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아요. 당신은 뭔가에 화가 나서 여성을 완전히 놓쳤어요.”

1959년의 데이지, 2024년 클레어, 2046년의 데이지. 1인 3역, 무수히 많은 대사가 단 한 번도 입안에 걸리지 않고 쏟아진다. 정확한 발음으로 안정감 있게 뱉어내는 대사의 전달력이 좋다. 소녀시대 출신으로 이젠 어엿한 배우로 활동 중인 최수영이 처음으로 연극 무대에 섰다. ‘와이프’(2월 8일까지, LG아트센터)은 극작가 새뮤얼 애덤스의 작품으로 ‘테베랜드’, ‘더 웨일’, ‘그을린 사랑’의 신유청이 연출을 맡았다.

연극은 배우에게도 관객에게도 쉽지 않다. 1959년부터 1988년, 2024년, 2046년까지 네 시대에 걸쳐 혈연으로 이어온 성(性)소수자의 역사를 그려간다. 1959년 가부장 시대를 살아가는 데이지와 그의 동성 연인 수잔나, 1988년 데이지의 아들로 성 정체성의 자유를 갈망한 아이바와 세상의 시선에 벽장 안에 갇힌 동성 연인 에릭, 2024년 ‘게이 꼰대’가 된 아이바와 그의 동성 연인 핀, 에릭의 딸로 이성애자인 클레어, 2046년 연극배우 수잔나와 페미니스트 퀴어 데이지의 이야기가 시대의 변화에 따라 흘러간다.

연극 ‘와이프’ [글림컴퍼니 제공]

연극의 스토리는 각각의 시대 속 등장인물이 만들어가나,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여성과 성소수자를 두 개의 큰 구조로 엮었다는 점이다.

각각의 시대가 문을 열 때, ‘와이프’에선 입센의 연극 ‘인형의 집’이 극중극 형식으로 등장한다. 4개의 시대가 그리는 ‘인형의 집’은 여성의 지위, 여성 해방운동의 흐름에 대한 당대의 인식을 담는다. 극중극을 마친 이후 나누는 시대별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그 시대가 마주한 퀴어의 삶을 보여준다. ‘인형의 집’은 여성의 인권을, 그것 이후의 이야기는 성소수자의 삶과 권리를 말하는 것이다. 시대가 변하며 여성도 퀴어의 삶도 달라진다. 이들은 각자의 삶에서 ‘나다움’과 ‘자유’를 찾는다. 옳음을 지키려다 처절하게 스러지고, 시대의 폭력을 견디다 지난했던 투쟁의 역사를 잊기도 한다.

2024년, 클레어와 성소수자 커플 아이바와 핀이 대립하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여성 해방운동의 상징이었던 ‘인형의 집’ 속 노라를 게이 남성이 맡는 파격 앞에서 ‘차별의 역사’를 살아왔던 두 인권이 맞부딪힌다. “가장 독창적이고 혁신적인 건 1879년 희곡에 쓰여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는 대사는 깊이 남는다. 여전히 19세기 노라의 삶이 이어지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연극 ‘와이프’ [글림컴퍼니 제공]

신유청 연출은 “와이프라 불리는 사람들은 사회 속에서 가장 힘이 없는 존재”라며 “짓밟히면서도 소리를 내고 싶고, 옳음을 지키기 위해 고통받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단어가 와이프”라고 했다. 배우들은 개막을 앞두고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연극”이라며 “지금도 이해하고 있다”고 했다. 최수영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러한 억압을 당해본 적이 없어, 대본의 깊이가 어디까지인지 무척 알기 어렵다”며 “그럼에도 방대한 시대와 빽빽한 논쟁 속에서 인물들이 자기 자신을 찾으려 노력하는 정신이 좋았다”고 했다.

막바지를 향해가는 현재, 이 연극이 그에게 어떻게 남아있을지 궁금하다. 2007년 걸그룹 소녀시대로 데뷔한 이후 언제나 ‘시선의 중심’에 있었다. 수영이 활동해온 지난 17년의 시간 안엔 걸그룹과 여성 연예인을 대상화, 상품화 하던 시절이 있었고, 철저한 통제와 만들어진 이미지로만 존재해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세상의 인식과 무관하게 스스로는 체감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이 연극에선 수영이 옷을 갈아입는 장면이 나온다. 개막 초반 해당 장면에서 쉴 새 없이 카메라가 터졌다. 수영이 옷을 갈아입는 장면을 노골적으로 담으려는 도둑 촬영이었다. 범죄에 가까운 촬영이 이어지는 동안 극장 측에선 어떤 제재로 없었다. 2024년, 한 여성 배우가 무대 위에서 겪은 사건은 지극히 폭력적이고 끔찍한 인권 침해로 느껴졌다. 그것은 이 연극 속 주인공들이 견뎌야 하는 것과도 다르지 않았다.

그의 연기는 대사 전달력은 좋았지만, 감정 연기에선 호오가 갈리고 있다. 다채로워야 할 감정들이 섬세하지 않다고 보는 반응도 많다. 하지만 때때로 감정이 몰아치는 수영의 눈빛과 큰 눈에 차오르는 눈물은 오래 기억에 남는다.

‘템플’ [극단 ‘공연 배달 서비스 간다’ 제공]

또 하나의 문을 연 김세정…고개 숙이지 않고 씩씩하게 ‘템플’

“이 문을 발견할 순간을 얼마나 꿈꿔왔는가. 아마추어라는 숨구멍이 날 두근거리게 한다.” (첫 공연을 앞둔 세정의 인스타그램 스토리)

무대 위의 김세정은 예쁘지 않다. 민낯에 가까운 얼굴, 뽀글뽀글 구부러진 머리, 무릎 아래로 자꾸만 흘러내리는 기다란 양말. 금방이라도 소멸할 것 같은 유달리 작은 얼굴만 뺀다면, 그는 자신의 많은 것들을 지워냈다.

극단 ‘공연 배달 서비스 간다’의 ‘템플’은 김세정의 첫 연극 도전작이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실제 모델이기도 한 미국 내 가축 시설의 60%를 설계한 동물학자 템플 그랜딘의 이야기다. 극단의 대표인 민준호 연출이 극본을 쓰고, 안무가 심새인이 참여한 작품은 신체극으로 태어났다.

김세정에게 ‘템플’은 쉽지 않은 도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몇 편의 드라마를 통해 통해 색깔있는 연기를 보여줬지만, 자폐인 캐릭터는 처음이었다. 게다가 연극 역시 평범하지 않다. 지극히 정적이며, 무수히 많은 대사가 빽빽하게 채워진 보통의 연극과 달리 몸짓 언어가 극의 흐름을 이끈다. 그 몸짓들의 상당 부분은 자폐인 주인공의 감정과 현재의 상태를 보여주는 장치다. 김세정은 그 무대에 뚝 떨어져 자폐인으로 보는 세상과 송곳 같이 쏟아지는 감각들을 풀어내야 하는 짐을 짊어졌다.

‘템플’ [극단 ‘공연 배달 서비스 간다’ 제공]

연극은 자폐 스펙트럼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설명서이기도 하고, 자폐에 대한 편견을 깨부수는 인식 개선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자폐를 장애로 바라보고, 자폐의 원인을 냉담한 부모의 태도로 인식하던 시절의 이야기. 그 곳에서 템플은 폭력적이고 사회성이 떨어지는 골칫덩어리로 존재한다. 아무리 두드려도 깨어지지 않는 편견 앞에 선 템플은 무해한 표정과 호기심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

신체극인 만큼 자유자재로 몸을 쓰며 현대무용에 가까운 몸짓을 보여주는 장면들은 특히나 인상적이다. 사춘기의 민감한 변화와 참을 수 없는 신체의 자극을 붉은 끈으로 결박해 표현한 장면에선 자폐인의 고통을 상징적으로 잘 그려냈다.

‘템플’ [극단 ‘공연 배달 서비스 간다’ 제공]

연극에서 가장 많은 대사를 소화해야 하는 김세정은 위축되지도 긴장하지도 않고, 씩씩하게 무대를 장악한다. 덕분에 관객들은 아무런 불안 없이 그의 연기를 만날 수 있다. 수만 개의 감정들이 스쳐가듯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한 줄의 대사 안에 순식간에 달라지는 감정을 담아낼 때마다 관객들의 감탄이 나온다. 엄청난 연습과 노력의 결과였다. ‘템플’의 대본을 받아들고 무수히 많은 질문을 던지며, 그는 템플이 돼갔다.

이야기는 템플의 성장기를 보여주다 대학 졸업사로 마무리한다. 주변의 이해와 응원으로 편견과 시선을 딛고 세상으로 나온 템플의 마지막 이야기는 세상의 문을 끊임없이 두드려온 이들에게, 여전히 용기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으로 남는다.

“절대로, 고개 숙이지 말아요.”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