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 가족들이 입은 피해에 대해 국가가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는 법원의 첫 판결이 나왔다. ‘국가 배상 책임이 없다’고 판단한 1심 판결이 7년여 만에 뒤집힌 것이다. 그동안 가습기 살균제 제조사와 판매사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만 있었다.

서울고법 민사9부(재판장 성지용)는 6일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5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위자료 청구 소송의 항소심에서 “국가는 원고 중 3명에게 300만~500만원씩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다만 원고 중 나머지 2명에 대해서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구제 특별법에 따라 위자료에 해당하는 금액을 이미 받았다”며 국가 배상 대상에서 제외했다.

옥시레킷벤키저, 세퓨 등 가습기 살균제의 피해자가 발생한 것은 2011년부터였다. 이 사건은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한 피해자들이 2014년 제조·판매사와 국가를 상대로 제기했던 손해배상 소송들 가운데 하나다. 원고들은 환경부가 1997년과 2003년 살균제 원료인 PHMG(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 PGH(염화에톡시에틸구아니딘)에 대해 각각 유독 물질이 아니라고 고시(告示)한 것이 위법하다고 주장했다.

그래픽=김성규

1심과 달리 2심 재판부는 “국가는 가습기 살균제 물질의 유해성 여부에 관해 충분히 검증하고 관리할 의무가 있는데도 이를 게을리해 집단적 폐 손상이라는 피해를 발생시켰다”며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2심 재판부는 “당시 환경부 장관 등은 가습기 살균제 원료인 화학물질이 음식물 포장재 등의 용도로 사용될 것을 전제로, 유해성이 낮고 환경에 미칠 영향이 적어 유독물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심사·평가한 것으로 보인다”며 “그러나 화학물질이 포장재 용도 외에 사용되거나 최종 제품에 다량 첨가되는 경우에 관한 심사는 이뤄지지 않았고, 안전성도 검증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2심 재판부는 “그럼에도 환경부 장관 등은 화학물질이 ‘유독물 등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고시한 다음 이를 10년 가까이 방치했다”면서 “이는 현저하게 합리성을 잃어 사회적 타당성이 없거나 객관적 정당성을 상실해 위법하다고 판단된다”고 밝혔다. 현행 국가배상법 제2조 1항은 공무원이 직무를 집행하면서 고의 또는 과실로 법령을 위반해 타인에게 손해를 입혔을 때 국가가 배상하도록 돼 있다.

앞서 2016년 1심은 “가습기 살균제 사용과 피해자들의 사망 또는 상해 사이에 인과(因果)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제조사의 배상 책임은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공무원의 위법 행위가 없었다”며 국가의 배상 책임은 인정하지 않았다.

한 법조인은 “항소심에서 국가 책임 판단이 7년 만에 뒤집힌 데는 피해자 측이 추가로 낸 증거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1심 판결 이후 피해자 측 변호인은 ‘사회적 참사 특별조사위원회’가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조사하며 확인한 환경부 문서와 과학 연구 결과 등을 증거로 제출했다.

이번 판결이 이대로 확정되면 다른 피해자들도 소송을 제기해 위자료를 지급받을 수 있게 된다. 환경부에 따르면,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규모는 7900명 정도이다. 특별법에 따라 이미 구제 급여 조정금을 받아 국가 배상을 받기 어려운 피해자는 100명이 채 안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변호사는 “법원에서 인정한 개별 배상액은 크지 않지만 소송이 이어진다면 위자료 지급 규모는 막대해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측 변호인단은 이날 선고 이후 “국가 책임을 인정한 의미 있는 판결”이라며 “앞으로 이어질 국가 배상 소송에도 영향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특별법에 따라 지급된 급여를 손해배상액에 참작한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했다. 환경부는 “판결문 검토 등을 거쳐 상고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했다.